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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주 역사박물관’ 지하 수장고 한쪽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125년 동안 방치돼 왔던 목이 잘린 유골(두개골)이 들어 있다. 유골의 주인공은 동학 농민혁명 당시에 전남 진도에서 활동했던 농민군의 지도자다. 이 유골이 박물관 지하 창고에 있는 사연은 이렇다.
지난 1995년 7월25일 일본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학생들은 인류학교실의 옛 표본고를 정리하다가 헌 신문지에 싸인 종이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서는 여섯 구의 유골이 있었다. 다섯 구는 일본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것이었고, 한 구가 동학군 대장 유골이었다.
유골 표면에는 붓글씨로 ‘조선 동학당 수괴의 수급. 사토 마사지로로부터’라고 쓰여 있었다. 유골 속에 들어 있던 첨부 문서에는 ‘1906년 9월20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채집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유골을 채집했던 사토 마사지로는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의 제19기 졸업생이다. 그는 ‘식민론’과 ‘인종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유골을 일본으로 반입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발칵 뒤집혔다.
1996년 유해봉환위원회(위원장 한승헌 변호사)가 결성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와 천도교중앙총부 등이 나서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공문을 보내 유골을 돌려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1996년 5월30일,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유골의 주인은 누구일까. 당초 이 유골의 주인공은 진도 출신의 농민군 지도자 박중진으로 추정됐다. 그 근거로는 유골함에 ‘진도 출신 동학군 수괴’라고 표시돼 있었고, 국내 기관에서 감정한 결과 40대 남성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진도 조도면 출신의 박중진은 동학군을 이끌던 중 1894년 진압 당시 붙잡혀 47세로 죽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진도에 있는 박중진의 후손을 찾아 유전자(DNA) 검사를 실시했으나 직계가 아니라서 판단 불능으로 나왔다. 여기에다 유골 주인공의 키가 150cm로 추정되는 데 반해 실제 박중진은 키가 컸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골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는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박중진의 유골일 가능성이 크다. 유골은 고향인 진도군에 안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유골은 ‘진도에서 채집했다’는 문서를 근거로 망자의 고향인 진도 안장을 추진했다. 우선 정읍 황토현 기념관 사당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2002년 지금의 전주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진도군도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안장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2005년에는 ‘묘역 조성과 공원화 계획’ 등 학술 용역까지 마쳤다. 그러다 2009년에 진도 군수가 바뀌면서 상황이 변했다. 진도군은 ‘유골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아 진도로 안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묘역 조성 계획’도 철회했다. 그러면서 유골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붕 뜨는 신세가 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유골을 정읍 황토현 기념관 건물 인근에 모시는 것으로 대안을 제시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사업 운영 등이 어려워 계획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정읍동학혁명계승사업회와 정읍 공무원노조도 2010년 8월에 성명서를 내고 정부에 해결책을 요구했으나 변한 것은 없다. 당시 이갑상 부이사장은 기자에게 “유골을 안장할 묘역이나 추모 공간이 없는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모실 수가 없다. 올해 정읍시와 동학혁명기념재단측에서 중앙 부처에 예산을 요청한 상태다. 만약 예산 반영이 안 되면 유골은 계속 박물관 수장고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2002년 10월11일에 고인의 흉상(실물 크기의 1.5배)을 제작해 전주 역사박물관 전시실에 보관 중이다. 하지만 정작 동학군 지도자의 유골은 캄캄한 수장고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동학군 장군 유골이 국내에 봉환된 후 계속 방치된 이면에는 지방자치단체와 동학단체들이 정부 예산을 타내기 위한 꼼수가 있었다. 동학단체들은 그동안 “왜 유골을 안장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사업 운영이 어렵다” “예산이 없다” “예산 신청을 했지만 반영이 안 됐다” 등의 말을 되풀이했다. 안장할 돈이 없어 안장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볼멘소리만 했던 것이다.
유골을 놓고 지방자치단체와 동학단체들 간에 신경전도 끊이지 않았다. 처리 방법을 놓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서로 정부 예산을 타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다 예산이 반영되지 않으면 ‘나 몰라라’ 하는 식이었다.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진도군·동학농민기념사업회·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간에 의견이 엇갈린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지자체와 동학단체들의 정부 예산을 타내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2013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유골을 안치한다며 정부에 7억원의 예산을 요구했지만 부결됐다. 사업회 측은 김제시 원평면 구미란에 있는 무명 동학농민군 묘역 인근에 안장을 계획하고 특수지원을 요청했었다.
솔직히 유골 안치가 목적이었다면 1000만원에도 가능했다.
이에 대해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는 “주객이 전도됐다. 당장 급한 것은 100년 넘게 구천을 떠돌고 있는 유골을 안장하는 것이다. 일단 따뜻한 곳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면 그때 가서 묘역이나 추모공원을 조성하면 된다”며 “지자체나 동학단체들이 마음만 먹으면 최소의 예산으로도 안장할 수 있었는데, 예산만 타내려다 보니 지금까지 방치됐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혜문대표가 전주역사박물관장을 만나 동학군 장군 유골의 조속한 안장을 촉구하고 있다. 기자도 이날 동행 취재했다.
2014년 5월19일 혜문 대표, 동학혁명포럼 관계자 등은 전주 역사박물관을 방문해 이동희 관장과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등을 만나 “동학군 장군 유골을 20년간 방치한 행위는 반인권적 처사일 뿐만 아니라 헌법 161조 사체 보관 및 유골 영득에 관한 조항 위반이다. 조속히 안장 결정을 하지 않으면 검찰에 형사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혜문 대표는 또 감사원에 유골 보관은 반인권 행위란 취지로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동학혁명포럼 등이 동학군 지도자 유골의 조속한 안장을 촉구하고 있다.
기자도 조속한 안장 촉구에 동참했다.
전주시에도 관련 민원을 넣어 압박했다. 전주시는 유골 소유권을 갖고 있는 ‘동학농민기념사업회’에 공문을 보내 이사회 의결을 통해 해결 방안을 공식적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5월23일 기념사업회 측은 전주시에 공문을 보내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안치에 대한 회신’을 통해 “동학농민기념재단 등 각급 관계기관과 협력해 2014년 6월 중 ‘동학농민혁명지도자유골영구안치추진위원회(가칭)’를 구성하고, 올해 안으로 유골을 영구적으로 안치하는 사업을 마무리하겠다”고 답변했다.
그 후 동학단체들이 만나 그해 안장하는 것에 합의했다. 안장지는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가 유력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
이것은 혜문대표 등이 전주 역사박물관을 찾은 지 일주일도 안 돼 내린 결정이었다. 그동안 동학군 장군 유골을 안장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학단체들이 ‘염불보다 잿밥’에 욕심을 내면서 생긴 일이었던 것이다. 혜문대표는 “동학 농민군 최고 수뇌부 장군의 유골 안장을 20년간 방치하면서 예산 부족 탓만 했다. 부패한 정부와 탐관오리의 수탈에 항거했던 동학운동의 정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며 분개했다.
5월31일은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날이다. 2014년 이날 전주 역사박물관 앞에서는 전주 시민과 혜문대표 등이 참여한 가운데 ‘동학군 장군 유골 안장 촉구’ 행사가 열렸다. 이동희 박물관장은 “(동학군 장군 유골을) 황토현 전적지에 안장하기로 정읍시와 협의를 시작했다”며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제는 홀가분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그 때 뿐이었다. 이후에도 동학군 장군 유골은 5년이나 더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방치돼 있었다. 바로 안장한다고 약속했으면서도 또 다시 이행하지 않았다. 이후 다섯 해를 더 방치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오는 6월1일 전주시 완산 칠봉 투구봉에 안장된다. 전주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30분부터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전주동학농민혁명 추모관까지 상여를 앞세워 진혼의식을 거행한다. 김용택 시인의 추모시 낭송과 함께 유골은 오후 12시30분 추모공간에 안치된다.
씁쓸하다. 동학군 장군은 살아서는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하고, 일본군의 칼날에 목이 베어졌으며, 죽어서는 후손들의 ‘돈 싸움’에 두 번 죽었다. 과연 지금의 동학관련 단체들은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가치관을 계승하고 있기나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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