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자연씨는 1980년 1월25일, 전북 정읍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게 됐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어머니는 25세 때인 2005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부모가 없는 빈자리는 언니와 오빠가 채웠다.
장씨는 학산고등학교와 광주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의 한 빌라에서 언니와 둘이 살았다. 언니는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겨왔다.
장씨는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펼쳐나갔다. 2006년 롯데제과 CF에 캐스팅되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같은 해 드라마 '내사랑 못난이'에 출연했고, 2009년 '꽃보다 남자'로 얼굴을 알렸다.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 '정승필 실종사건' 등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장씨의 배우 생활은 화려할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지옥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소속사 대표는 유력인사들에게 술 접대를 강요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연예계 생활을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과 인신모욕성 욕설 그리고 폭행으로 이어졌다.
신인배우였던 장씨에게 소속사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장씨는 강요에 의해 접대 자리에 끌려 나가야만 했다. 단순 술 접대에 그치지 않고 성 접대로 이어졌다. 접대 대상은 사회 유력 인사들이었다. 장씨의 햐얀 꿈은 이들에게 짓밟히며 검게 멍들어갔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장씨는 2009년 3월7일 자택 내부 1층과 2층 사이 계단 난간에 목을 맸다. 그는 죽기 전 기업인과 유력 언론사 관계자, 연예기획사 관계자 등에게 성 접대를 했다고 폭로한 문건을 남겼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다.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세상에 고발한 신인 여배우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장씨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친언니였다.
장씨가 단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다. 연이어 장씨의 죽음을 보도하며 이슈화했다. 당시 <시사저널> 사회팀에 소속됐던 필자도 취재에 들어갔다. 유족(언니, 오빠)의 인터뷰를 위해 경기 분당에 있는 빌라를 찾아갔다.
장씨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언니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앞에는 이미 여러 언론사의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필자도 한동안 그곳에서 뻗치기를 했지만 언니를 만나지는 못했다.
장씨와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유족들이 언론을 불신하고 기피하고 있다”라며 꺼려했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미니홈피를 통해 접촉해 보기로 했다. 장씨의 미니홈피에는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글을 남기면서 폭주하다시피 했다.
그곳에 올라와 있는 글을 살펴보다가 언니가 남겨놓은 글을 찾았고, 언니의 미니홈피와 연결될 수 있었다. 일단 ‘쪽지 기능’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정성을 다해서 쪽지를 보냈다. 한 열 통쯤 보냈으나 끝까지 답장은 없었고, 결국 인터뷰도 실패했다.
하지만 쪽지를 보내면서 동생을 잃은 언니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쪽지를 보내면 대부분 1~3분 안에 ‘수신 확인’이 되고 있었다. 장씨의 언니는 동생의 미니홈피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미니홈피를 통해 달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미니홈피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동생의 미니홈피에 어떤 글을 남기는지 하나하나 챙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 같은 동생을 잃은 언니의 슬픔은 오죽했을까.
자연씨 미니홈피 대문에 언니가 올려놓은 글은 '사랑하는 우리 애기. 이름 부르는 것도 안타까운 우리 애기. 부디 좋은 곳에서 행복하길. 사랑해 우리 애기' 였다.
장자연의 시신은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화장된 후 부모님이 안치된 전북 정읍시 소성면 묘소 근처에 뿌려졌다. 장씨의 발인이 끝난 후에도 언론에서 숱한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자 오빠는 언론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오빠는 “저를 포함한 가족들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소문들만 늘고 있는 것 같아 눈물 밖에 나오질 않는다”고 운을 뗀 후 “항간에 떠돌고 있는 자연이의 죽음에 대한 각종 추측성 보도들을 삼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당부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매체들이 우울증, 소속사와의 계약 문제, 허무감 등의 단어를 써가며 자연이의 죽음에 대해 끊임없는 보도를 하고 있다”라며 “특히, 소속사 측에서 가지고 있던 문서를 유서인 냥 보도하며 '스폰', '보이지 않는 힘' 등 입에 담기도 힘든 선정적인 단어로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더 아프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소속사 문제, 유서 등 이유야 어쨌든 우리 자연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제발 부탁드리오니 각종 추측성 보도로 가엾은 자연이의 가는 길까지 어둡게 하지 말아 달라. 막내 자연이를 비롯해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그때 만해도 ‘술 접대’ ‘성 접대’의 실체는 안개속에 가려진 채 각종 루머와 추측이 난무했다. 유족들은 경찰 수사에서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기 바랐다. 하지만 경찰은 처음부터 수사 의지가 없었고 오히려 은폐하기에 바빴다.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숨기고 법으로 단죄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데 급급했다. 장씨의 죽음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몰아갔다.
장자연의 미니홈피는 숨진 지 약 50여일이 지날 쯤엔 270여만 명이 방문했다. 자살 직후 하루 1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았다. 한때 악플이 달리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7월5일 필자는 장씨의 미니홈피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접속이 되지 않았다. ‘탈퇴한 회원의 미니홈피입니다’라는 안내문만 나왔다. 미니홈피를 관리하던 언니가 폐쇄한 것으로 보였다. 언니의 미니홈피를 방문해 보려고 했으나 역시 접속이 되지 않았다.
언니도 함께 미니홈피를 탈퇴한 것 같았다. 당시 싸이월드 운영규칙에는 미니홈피 운영자가 사망할 경우, 홈피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가족들이 사자(死者)와의 관계를 증명하면 미니홈피를 폐쇄할 수 있었다.
장자연씨의 유족은 왜 그의 홈피를 폐쇄했을까. 필자는 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찰 수사과정, 언론의 선정적 보도, 사회의 냉대 등을 보고 몇 번이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분노했을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은 요리조리 모두 빠져나가고, 결국 동생만 희생양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유족들은 다음해인 2010년 10월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배상하라”며 장씨의 소속사 전 대표를 상대로 1억6천만 원 대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2014년 10월12일 법원은 “김씨의 요구나 지시로 장씨가 저녁 식사나 술자리 모임에 자주 참석해 노래와 춤을 췄고, 태국 등지에서의 골프 모임에도 참석했다. 비록 형사사건에서 술접대 강요나 협박이 증거부족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술자리 참석 등이 장씨의 자유로운 의사로만 이뤄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며 유족에게 2천4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소속사 대표로부터 술자리 접대를 강요받았음을 인정한 판결이다.
지난 10년 동안 ‘장자연 사건’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사이 몇 차례 언론사의 문건 보도로 관련 수사를 벌였지만 유야무야 끝났다. 문재인 정부 들어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를 통해 사전 조사를 벌였다. 13개월에 걸쳐 80명이 넘는 참고인을 조사했지만 범죄 수사를 이어갈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됐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장자연 문건 작성을 도운 매니저 유아무개씨는 관련 문건들을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모두 태웠다. 그때 장자연씨의 오빠도 함께 있었다. 당시 오빠 장씨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녹음기를 가져갔고, 태우는 과정을 녹취에 담았다.
이후 장씨는 “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녹음기를 가지고 갔는데 상황이 다 녹음되어 있으니 수사에 참고하라”며 경찰에 녹음기록을 건넸다. 이 내용은 경찰 조서에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수사기록에는 녹음 파일이나 녹취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누군가 수사 방해를 위해 조직적으로 증거들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니 과거사위에서 제대로 건질 수 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과거사위는 사건 당시 장자연이 술 접대를 강요받은 정황은 인정되지만, 성폭행 피해 의혹은 수사를 권고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확보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재수사 권고는 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핵심 의혹인 술접대·성상납 강요 등에 대한 재수사가 어려워 사실상 미제로 남게 됐다. 결국 구천을 떠돌고 있는 장자연의 억울한 원혼은 더 억울하게 됐고, 그 한은 영원히 풀 수 없게 됐다. 유족들의 상처도 더욱 깊게 패였다.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해 사익을 챙기려는 사람들도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