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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에는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다.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년)에 준공됐으며,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도성의 남쪽 문이자 정문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숭례문은 여러 번에 걸쳐 수난을 겪었다.
일제는 ‘숭례문’ 이름 대신 ‘남쪽에 있는 문’이라고 비하하며 남대문이라고 불렀다.
1907년 일제는 본국의 황태자가 방한하자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며 숭례문과 연결된 서쪽과 동쪽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한 후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광복 이후인 1962년 12월20일 정부는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했다. 1995년에는 일제가 지은 ‘남대문’을 버리고 본래 이름인 ‘숭례문’을 되찾았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뒤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문화재 명칭을 재검토하면서 본래 이름을 찾은 것이다. 2006년 3월 정부는 숭례문을 개방해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했다. 일제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지 99년만이다.
그러나 3년 후 숭례문에 대재앙이 닥친다.
2008년 2월10일 오후 8시40분쯤 숭례문 2층에서 시뻘건 불꽃과 함께 하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숭례문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목조 건물인 숭례문은 금세 화염에 휩싸였다. 불이 나자 소방차와 소방관들이 출동해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불길을 제 때 잡지 못했다.
2월11일 0시25분에는 2층 누각 전체에 불이 붙었고, 불이난 지 4시간 만인 0시58분에는 지붕 뒷면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얼마 뒤 2층이 붕괴되면서 1층에도 불이 옮겨졌다.
그리고 오전 1시54분 기와가 와르르 무너지며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을 남긴 채 모두 붕괴됐다. 국보 1호 숭례문은 이렇게 불길에 휩싸인지 5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늠름했던 위용은 간데없고 처참한 잔해만 남았다. 아울러 국민의 자존심도 무너졌다.
언론은 처음에는 ‘전기시설의 누전 등으로 인한 화재’라고 보도했으나 화재 발화점인 2층에는 전기시설이 없었고 1층에 있었던 전기시설은 정상으로 확인됐다. “숭례문에 50~60대로 보이는 흰머리의 남성이 가방을 메고서 휴대용 철제 사다리를 타고 철장을 넘어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도 있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나무기둥 아래에서 일회용 라이터 2개와 불에 탄 나뭇조각 등을 발견했다.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게 분명했다. 경찰은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방화범 검거에 나섰다. 먼저 숭례문에 설치됐던 폐쇄회로(CC)TV를 살펴봤다.
그랬더니 60대로 보이는 흰머리의 남성이 포착됐다.
그는 항공점퍼 상의를 입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한쪽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이 남성은 휴대용 철제 사다리를 타고 숭례문 철장을 넘어 들어갔다. 얼마 후 시뻘건 불꽃과 함께 흰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당시 숭례문을 관리하고 있던 업체의 직원은 퇴근하고 CCTV만 켜진 상태였다. 문제는 CCTV 화질이었다. 범인의 모습은 찍혀있었으나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 식별이 불가능했다. 경찰은 방화의 경우 재범률이 높다는 것을 파악했다.
미국 법무부는 방화 범죄의 재범률이 57.7%라고 발표한 적도 있다.
당시 경찰은 범죄정보관리시스템인 심스(CIMS)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범죄자와 관련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초동수사 단계에서 용의자를 찾도록 도와주는 검색엔진이다.
여기에는 2004년 이후 발생한 천만 건이 넘는 범죄기록이 담겨 있다. 범인의 진술 내용과 범행수법, 성장 과정, 심리상태, 외모와 범인의 특징, 사법처리 결과까지 키워드 검색을 통해 한 눈에 찾아볼 수 있다. 경찰은 이런 방식으로 용의자를 추적해 나갔다.
최초의 키워드는 '방화'와 '문화재'였다. 이 가운데 사회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던 사건으로 재차 용의자를 좁혀갔고, 최종 3명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이 중 두 명은 수감 중이었고, 단 한 명만 남았다. 그가 바로 채종기(70)였다. 그는 2006년 4월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력도 있었다.
경찰은 채씨의 거주지에 형사대를 급파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3시간 만에 인천 강화군 하점면에서 그를 검거했다. 채씨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비슷한 인상착의를 하고 있었고, 그의 집에서는 사다리, 의류, 시너병 등이 발견됐다. 또 신발에서는 숭례문에 칠해져 있는 것과 동일한 성분의 시료가 채취됐다. 경찰은 채씨를 서울 남대문경찰서로 압송해 범행을 추궁했다.
채씨는 경찰 조사에서 “내가 불을 질렀다”며 방화를 시인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고 범행에 나섰다고 밝혔다.
채씨는 2남2녀의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 1970년대부터 경기도 고양시 주엽동에서 배추나 무 등을 재배하며 살았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지만 젊었을 때 독학으로 주역을 공부했다.
이것을 밑천삼아 1995년까지 고양시 일산동에서 남의 사주나 토정비결 등을 봐주는 철학관을 운영했다. 채씨는 담배는 피우지 않았다. 술도 어쩌다 반주로 한 잔 정도만 마셨다. 평소엔 말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의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가 괴팍해진 것은 2001년 그의 단독주택이 도로로 국가에 수용되면서다. H건설이 아파트를 지으려 그의 토지 약 99㎡(30평)를 수용하려 했다. H건설은 공시지가인 9천600만원보다 많은 1억 원(건물 값 포함)을 제시했다. 하지만 채씨는 “인근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낮다”며 4억~5억 원을 요구했다. 건설사는 채씨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채씨는 건설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관할 고양시청을 비롯해 청와대에도 진정서를 넣었다. 고양시청에는 2주에 한 번 정도 찾아가 보상액을 높여 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시청에서는 채씨에게 보상액 책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그는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채씨의 아내 이아무개씨(70)가 “보상금으로 편하게 아파트에서 살자”고 말했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채씨는 건설사와의 소송에서 패소했다. H건설은 2006년 3월 1억 원의 공탁금을 걸고 채씨 집에 철거반원들을 보냈다.
집이 철거되자 아내 이씨는 “이렇게 된 것은 당신 탓”이라며 채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채씨는 아내의 뜻대로 이혼했다. 그래도 부부생활은 이어갔다. 강화도 하점면에 집을 마련하고는 이씨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자신의 땅이 강제 수용 당하자 채씨는 사회에 대한 증오와 피해의식을 드러냈다.
“국가가 가진 놈 편만 든다”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웃과도 마찰을 빚었다. 이웃이 운영하는 목장 분뇨탱크 때문에 물에서 악취가 심하게 난다며 면사무소에 지속적으로 진정을 냈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목장을 찾아가 조사하고, 상수도 검사를 했지만 정상으로 나왔다.
2006년 4월 채씨는 “억울함을 알린다”며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 법원은 초범인 데다 공탁금 500만원을 낸 채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다. 아울러 주요 문화재를 불태운 피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채씨에게 1천30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채씨는 창경궁 방화 이후 문화관광부가 수리비용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자 더 억울해 했다. “죄 없는 나만 죗값을 치르냐”며 모든 것을 국가와 사회 탓으로 돌렸다.
그가 숭례문 방화 전 남긴 자필 편지에는 “억울함을 수차례 진정했으나 정부는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회사 편만 드는 판사는 없어져야 한다” “창경궁에 놀러 갔다 불 난 곳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방화범으로 (나를) 몰았다” “변호사가 수차례 거짓 자백하라고 했다” “정부는 약자를 죽인다” “나는 억울하다” 등의 글을 남겼다.
결국 그의 분노와 적개심은 국보 1호인 숭례문을 잿더미로 만들면서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경찰은 “채씨는 문화재가 국가를 대신한다고 생각해 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 위한 표적으로 숭례문을 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채씨를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이들은 계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특징이 있다며 사회에 대한 비합리적인 불만과 피해의식이 계속 증폭돼 남대문 방화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채씨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채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는 재판 내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국민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채씨는 재판 과정에서 “토지 수용 보상금이 너무 적다. 국가에 의해 심히 부당한 처분을 받았다”는 등의 주장만 되풀이 했다.
이에 재판부는 “국가의 소송제도 등 각종 적법절차에 의한 처리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폭력적 불법행동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사회적 범죄행위”라며 그를 강하게 질타했다.
재판부는 또 “숭례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문화재로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고 국보 1호로 지정돼 우리 국민은 높은 민족적 자긍심을 간직해왔다”며 “국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수치심으로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운 큰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채씨는 재판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2심도 원심과 같은 판단을 했다. 채씨는 또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했으나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채씨는 2018년 2월 만기 출소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방화를 기억하기 위해 2011년부터 매해 2월10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은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중부소방서 주관으로 문화재 재난대응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최악의 졸속 공사로 부실 복원
숭례문은 복구 작업을 거쳐 5년 만인 2013년 4월29일 복원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실 복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복원공사가 완료된 지 5개월 만에 나무 기둥이 갈라지고 뒤틀렸다. 단청에서 박락(색이 벗겨짐) 현상이 일어났다.
단청에 사용된 재료를 일본 수입산을 쓴 것도 문제였다. 단청은 목조 건물에 화려한 색채로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단청의 원료로는 ‘안료’와 ‘아교’가 사용된다. 안료는 색깔을 내는 원료이고, 아교는 이를 목재에 붙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숭례문에 사용된 안료 11가지 중 9가지는 일본에서 수입했다. 안료를 바르는 데 사용된 아교도 일본산을 사용했다. 단청에 물이 닿으면 얼룩이 생기는 현상을 막고자 단청장이 임의로 동유(희석 테레빈유)를 바르는 바람에 화재 위험성이 더 커졌다.
숭례문 복구공사를 맡았던 홍창원 단청장은 천연 안료 대신 사용이 금지된 값싼 화학안료와 화학접착제를 사용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공사대금 6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문화재청은 홍씨에 대해 2017년 8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자격을 박탈했다.
전통 방식의 복원이냐는 논란도 이어졌다. 처음 공개 발표회 때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석재를 쌓았는데 나중에는 크레인을 통해 작업했다. 석축 사이에 쌓인 토사를 굴삭기로 파내면서 조선시대 토목 기법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다.
고증을 거쳐 기존 숭례문의 규격대로 제작하기로 했던 기와도 업체로부터 시공이 번거롭다는 의견을 받고는 KS규격으로 변경, 화재전과 모양과 크기가 크게 달라졌다.
숭례문 지반을 복구하는 과정에서도 문화재청이 제대로 된 고증이나 자문 없이 공사를 진행, 숭례문과 주변 계단부분이 복구 기준시점인 조선 중·후기 지반보다 최고 145㎝ 높아졌다.
신응수 대목장은 숭례문 복원용으로 문화재청에서 공급받은 금강송 26그루 가운데 4그루(시가 1198만원 상당)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돼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신 대목장의 제자 문아무개씨에게는 국민기증목 304본 가운데 140본(시가 1689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이렇듯 숭례문 복원은 ‘최악의 졸속 공사’라는 오명을 썼다. 이에 따라 가치가 심하게 훼손돼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 대안으로 ‘한글’이 대두됐으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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